
와! 빔 벤더스 작품전
2번째 타자는 <이 세상 끝까지>

사실 이 영화는 시놉시스도 흥미로웠지만
디렉터스 컷이 5시간씩 상영하다보니
뭔가... 업적을 따는 느낌으로 잡아서 보게 되었다
영화는 거의 2시간 기준으로 1부, 2부로 나뉘는데
사이에 15분 인터미션이 있다

1부 인터미션
재미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나는 동안 베니스, 파리, 리스본, 모스코, 상하이, 도쿄, 하코네, 샌프란시스코를 다 돌았다
영화가 1991년 개봉작이고, 배경은 1999년 세기말인데
세기말을 상상해서 그런가? 패션은 정말 지금 봐도 전위적인 센스를 보여주고
기술은 예전 사람들이 떠올린 근미래 sf풍이었다
사실 현대에는 쓰이지 않는, 아직 발명이 되지 않았거나 발명할 필요가 없는 기술들
(예시: 화상 통화가 되는 공중전화)
이런 걸 찍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다.
특히나 AI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렇게 돈과 시간과 노력과 진정성을 쏟아부은 로드무비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참 귀한 체험이다 싶다
단점이라고 하면, 여자가 너무 안 나온다
그야 세상에 여자가 없는 게 아니니까 나오기는 하는데
주인공 클레어 주변에서 계속 등장하는 주조연이 다 남자다

저녁은 스몰 세트
ㄱㄱ

팝콘 사고 화장실 다녀왔더니 2분 남았다
2부도 가보자고

2부는 전혀 다른 장르였다
1부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면
2부는 호주에 머물고,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꿈에 중독된 사람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꿈 중독이 거의 스마트폰 중독이나 다름없다
어느 과학자의 발명으로 자기 자신이 꾸는 꿈을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됐는데
여기에 주인공 클레어도 클레어와 사귀었던 남자도
다들 빠져버린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언제까지 찍을 셈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중독 치료 과정까지 다 보여준다...
클레어의 전남친이자 아직 클레어를 사랑하는 이 영화의 나레이터
작가 유진이 클레어를 아주 헌신적으로 돕는다
물론 유진은 작가이지, 치료상담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지에 중독된 클레어를 구할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글쓰기를 시작한다
유진은 낡은 타자기를 구해서 자신과 클레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여태 겪어온 모험을
전부 종이에 써내려간다
물론 유진이 글을 쓰는 동안 클레어는 배터리가 없는 꿈 모니터를 들고
유진을 원망하며 울어댔기 때문에 유진 역시 적잖이 힘들어했다
중독 증세로 괴로워하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유진은 자신이 좋아하는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또한 종말에는 이 구절이 아래처럼 바뀔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미지만 남았다'
2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도 그렇지만, 나레이터인 유진의 독백을 통해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감독의 상상과 의견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유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여행을 함께한 동료 중 한 명이 이제 책은 쓸모가 없다며, 자신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을 걱정한다고 유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진은
'현재는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지만, 미래는 우리가 상상해야만 한다'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유진의 글 속에서 클레어는 건강하고, 힘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진이 되찾기를 바랐던 클레어의 미래일 것이다
중독에 빠진 클레어에게 유진은 자신이 완성한 원고 뭉치를 주었고,
클레어는 그를 읽어본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되는데?'
클레어와 유진은 함께 도시로 돌아간다
둘은 좋은 친구로 남았으며, 클레어는 우주 기지에서 해양 오염을 감시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
이 외에 여행을 하다 만난 친구들, 동료들, 클레어가 사랑했던 샘까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다 보고 나니 5시간 동안 주인공 클레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치 5시간이나 되다보니 위대한 삶의 여정으로까지 느껴졌다
처음 클레어는 중독에 취약하며 살 이유를 찾지 못하는 여성이었는데,
샘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5시간 동안 4대륙을 다니고 자기 자신의 꿈속에도 들어갔다 나오면서
결국은 바라던 대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보통 주인공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과 이어지는 것이 좋은 엔딩, 해피엔딩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클레어는 샘과 딱히 이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과도 이어지지 않고 온전히 홀로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고 좋은 영화로 느껴진다
위에서 삶의 여정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클레어는 몹시 젊다
그런 나이에 그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니... 그것도 5시간 동안이나
집에서는 절대로 못 봤을 듯하다
그리고 음악이 전부 듣기 좋은 것뿐이라
음악 선정도 멋졌다

받은 포스터
사실 포스터를 받기 전에는 오른쪽 포스터가 갖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왼쪽 포스터가 더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 끝까지,
제목이 씌어있지 않아도 이미지와 감독 이름만으로 영화를 전달하는 면이 멋지다
1부와 2부를 각각 보면서 떠오른 다른 영화를 적어보자면
1부는 천년여우가 떠올랐다
천년여우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주인공인 타치바나 겐야가
지금은 은퇴한 전설적인 배우인 후지와라 치요코를 찾아가 그간의 연기 생활 전반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콘 사토시인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놓는 데 큰 재능이 있어 정말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아무튼 후지와라 치요코는 어느 날 경찰에게 쫓기던 이름 모를 사내를 숨겨주게 되고, 사내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내는 이름도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 홀연히 전쟁통인 만주로 떠나버린다
치요코는 그 사내를 만나기 위해 배우가 되어 만주 촬영을 떠나는데
이때부터 줄곧 온갖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를 찍었으며, 그 역할들 또한 어떤 남자를 힘껏 쫓아가는 배역이 대부분이었다
이 세상 끝까지 1부에서 클레어는 샘과 사랑에 빠지지만
샘은 여기저기 도망다니고, 클레어는 그런 샘을 집요하게 추격한다
그런 점에서 천년여우의 치요코가 겹쳐보이기도 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만주로 떠난 사내는 어느 순간 치요코의 환상이었고, 어떤 때에는 진실이고 어떤 때에는 욕망이어서
보는 관객이 저 사내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가 아주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샘은 클레어의 허구도 욕망도 아니고 정말로 실존하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이를 나레이션의 입을 빌어 정확히 짚어주어서 재미있었다
감독의 상상력과 우려가 돋보이는 2부를 보면서는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떠올랐다
꿈을 영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에 중독되어가는 과정과 치료 과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은 영화로밖에 만들 수 없는 것을 영화로 만든다고...
실제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나서 꿈을 영화로 만들면 이럴 것이다 느끼기도 했다
꿈에 중독된 사람들을 그린 빔 벤더스와
꿈을 영화로 만들어낸 데이비드 린치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324 영화 미국인 친구 (0) | 2026.04.07 |
|---|---|
| 0322 영화 쇼생크 탈출 + 건대 고향반점 (0) | 2026.04.07 |
| 0319 영화 굿 윌 헌팅 (0) | 2026.04.03 |
| 0304 영화 브라이드! (0) | 2026.03.09 |
| 0227 영화 씨너스 남현아 남돌비 (0) | 2026.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