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비노
요리 만화로 제법 귀여운 제목과는 다르게
주방에서의 악기바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딱히 악기바리를 고발하는 만화는 아니고, 되레 그 안에서 피어나는 유혈 동반 유대라든지... 신뢰... 뭐 그런 것들을 뜨겁게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둔다
사상이 사상인 만큼 정말 예전 만화이기도 하다
연재 시작 시기가 2005년 즉 20년 전이다
요즘 세대가 본다면 부조리
이전 세대가 본다면 이거지
...요리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없으니 현재진행형으로 악기바리가 당연시되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밤비노>의 주인공 그 이름은 반 쇼고
후쿠오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청년으로
이탈리안 요리를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귀고 있던 고향 여자친구도 거진 차버리고 상경해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바카나레에 들어간다
엄밀히 말하자면 찬 건 아닌데,
후쿠오카에서의 비교적 확실했던 미래를 던지고
성공할 지 어떨 지도 모르는 도쿄로 상경해서 몇 년을 내 마음대로 살겠다 하니
거의 결혼하려 했던 여친 입장에서는 차버린 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바카나레에 도착한 주인공 반 쇼고는
악기바리 문화를 잘 모르는 세대도 "클래식 악기바리"로 여길
접시닦이부터 주방 일을 시작하는데
상사이자 파스타 담당인 카토리가 폭력적인 편이라
폭언, 폭력은 일상이고 뜨거운 팬을 일부러 던져서 화상을 입히기도 한다
또한 여기서 처음으로 밤비노 라는 제목의 유래가 등장한다
카토리는 갓 상경해서 무지막지하게 얼타는 주인공 반 쇼고의 이름 대신,
이탈리아어로 아이, 애송이라는 뜻의 밤비노로 낮잡아 부른다
이후로도 여러 인물들이 여러 상황에서 반 쇼고를 밤비노라 부르는데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현재 9부에 걸쳐 굉장히 오랜 기간 연재중인 만화로
각 부마다 주인공의 이름이 죠나단 죠스타, 쿠죠 죠린 등 전부 다르지만 어떻게든 죠죠라 불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보니 반 쇼고는 밤비노 외에 반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하간 만화 <밤비노>의 중요한 부분은
직장 내 폭력 및 부조리 문화 옹호가 아니다
물론 이를 문제삼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밤비노>의 특징 그것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난 이런 내용에는 별 관심 없었다
주방에서의 악기바리, 부조리 문화
내가 보기엔 굳이 저럴 일이 아닌데 카토리가 주인공을 너무 쥐어패니까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그런데...
싫으면 안 읽으면 될 일이지만 내용이라든가 연출이 정말 재미있었다
요즘 이런 만화를 본 적이 드문데 정말 빨려드는 것 같았다
우선 인물들의 표정이 살아있다
특히 눈이 살아있고, 작가가 먹선을 써서 굵게 그리는 장면들이 있는데
여기는 잘 봐야 한다, 여기는 힘을 줬다는 의도가 느껴지면서 깊은 감명을 준다
뒤이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다음이 궁금해지는 <밤비노>를 읽다 보니
그렇게 싫던 카토리가 너무나도 멋있는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절대 악기바리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카토리가 멋있다 여기게 된 계기 역시 부조리 문화 실행범으로서의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정확히 어느 에피소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밤비노를 인정하고 투박하게나마 이끌어주는 모습이 훌륭했다
이렇듯 <밤비노>는 단일 에피소드만으로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1화로 세탁"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반 쇼고의 시점을 따라서 진행되는데,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인물들과의 갈등이라든지 관계, 인품을 느리지만 강렬하게 보여준다
미숙한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위기와 그에 대처하는 과정 그리고 성장
"사이다"문화가 인기를 끄는 지금 누군가는
"고구마"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때로는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지는 과정이긴 하나
역으로 그 어떤 갈등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의 강점이기도 하다
약한 주인공에게 적재적소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재벌가 회장님, 야쿠자 두목, 유력 정치인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제공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전부 반 쇼고가 고생으로 쟁취해서 얻어낸 인연이다
더 큰 뒷배에 기대지 않고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로써 주인공은 자신의 방식대로 확실하게 종지부를 짓는다
이 과정 자체가 이들이 요리하는 이탈리안 풀코스의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니 이 만화 이탈리안 요리 만화였다
위에 적은 것만 읽으면 주방에서의 악기바리 만화로 보일 수 있는데,
만화 내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각양각색의 이탈리안 요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가... 요리 만화를 그리기로 했으니 당연하지만 요리를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다
비단 파스타뿐만 아니라 돌체라 부르는 디저트, 리조또, 그리고 2부로 넘어가서는 고기 요리까지 거침없이 그려낸다
나아가 요리도 요리지만
주방에 있던 주인공을 사라(홀)로 내보내 그곳에서도 배우게 만드니
작가가 주방, 요리뿐만 아니라 접객, 레스토랑 운영 그 자체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밤비노>는 총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 비하면 솔직히 2부가 좀 억지스러운 면도 있고
갈등 해소라든지 소재 선정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부에 비하면, 이지
2부도 명작임은 틀림없다
2부는 한국에 정발이 안 된 걸로 알고 있다
원문으로 읽거나, 정식 발매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린다고 해줄까? 그건 모르겠다
1부를 더 재미있게 봤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2부에 있는데,
반 쇼고가 뉴욕에 가서 고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호쾌한 멕시칸 동료 코요테 브라더스를 만났을 때였다
반 쇼고는 코요테가 부업으로 하는 케이터링 즉 출장 요리사 작업의 조수로 몇 번 일하게 된다
계속해서 함께 일하던 코요테는 반 쇼고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마피아의 케이터링에 초청하기에 이른다
말이 케이터링이지, 각 파벌의 이탈리안 요리 대결이기 때문에
진다면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밤비노라지만 목숨이 아까워 고민한다
이때 코요테가
영원히 살 셈이야?
인생은 단 한번 뿐이야.
라고 말을 하는데
차창 너머의 역광에 가리워 어둠 속에서 눈이 빛나는 코요테와
빛을 그대로 받으며 코요테를 보는 반반의 긴장한 얼굴
밤비노에는 감명 깊은 장면이 너무나도 많지만
이 장면을 보고 너무 감명받았다
나도 이렇게 무언가에 나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까
밤비노 역시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다
"홀은 천국, 주방은 전쟁터,
나는 천국을 만들기 위해 전쟁터에서 매일매일 타올라
천국이 빠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함
매일매일 그렇게 타올라 재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주방에 선다"
한번이라도 이렇게 열렬할 수 있을까?
나는 요리는 하나도 모르지만
특히나 지금도 반 쇼고와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태리어는 하나도 모르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런 열정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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